얼마 전 재미있게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을 소개해보려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주 여행이 보편화된 미래에, 한 노인 ‘안나’는 우주 정거장에 홀로 남아 남편과 아들이 있는 ‘슬렌포니아 제 3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동면 기술인 ‘딥프리징’을 연구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던 과학자였다. 그러나 동면 기술 없이도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웜홀 항법이 개발되면서, 그녀의 연구는 빛을 잃는다. 더군다나 가족들이 있는 슬렌포니아에는 웜홀 통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주선이 끊기게 되며, 가족들과의 이별을 맞이한다.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리 인류는 과학, 수학 같은 방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기술과 문명을 누리고 있다. 약 142만 년 전, 불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인류는, 이제 1억 도에 달하는 태양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만하다.
아직 우주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우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우리 입맛대로 자연을 훼손한다. 그 대가는 이미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 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해온 과학 기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만든 기술에 스스로 잠식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기술들에 도태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소외된다.
‘디지털 격차’라는 이슈를 다룰 때 등장하는 단골 예시인 키오스크만 봐도 그렇다. 코로나19와 함께 급속도로 보급된 키오스크는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소비 생활로부터 철저히 고립시켰다.
AI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과제나 업무에 AI를 활용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완성도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요즘은 chatGPT를 안 써봤다는 사람을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광경이 드물지 않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이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면, 그 기술이 과연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안나’의 대사는 기술 발전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관내 분실>
<관내 분실>은 죽은 사람의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기술이 발달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딸은 소원하게 지내다 돌아가신 엄마의 기억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하지만, 찾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가족 중 다른 사람에 의해 인덱스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기억을 검색할 수 있을만한 유품들을 모으고, 결국 삭제된 엄마의 기억을 찾아 데이터의 형태로 다시 살아난 엄마와 재회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AI와 디지털 휴먼 기술로 세상을 떠난 딸을 재현하여 가상 공간에서 엄마와 재회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딥러닝을 통한 딥페이크, 딥보이스 기술이 보이스피싱이나 가짜뉴스, 음란물 따위의 것들에 활용될 것이라는 우려를 조금이나마 해소해준 활용 사례였다.
이 책에서의 대사처럼 누군가는 이렇게 데이터로 구현된 목소리나 얼굴이 아무 의미없는 데이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것, 비록 합성된 모습이지만 다시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짧은 음성만으로 음성합성이 가능한 zero-shot 모델이나 학습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RVC 모델 등 음성 합성 관련 기술이 나오고 있다. 유명 가수의 목소리로 다른 가수의 노래를 커버하는 영상이 유튜브 콘텐츠가 된 지금, 저작권과 악용에 대한 우려에 휩싸인 음성합성 기술의 올바른 활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공생 가설>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에 다른 생명체가 공생한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태어난 후, 외계의 지적 생명체는 뇌 속에서 살면서 아이와 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에게 윤리, 철학과 같은 인간성을 가르친다. 그러다 아이가 7살이 되면, 그 생명체는 또 다른 아기에게 옮겨간다. 원래 있던 아이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기술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인간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소셜 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 간의 연결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고, 가짜 뉴스나 혐오 발언을 확산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기술이 인간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공개된 OpenAI의 GPT-4o voice 기능 시연 영상은 세상에 가히 큰 충격을 줬다. AI는 이제 사람처럼 소리를 듣고, 물체를 보고 생각하며, 공감하고, 말하고, 노래하고 또 그려낸다. 기술이 인간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인간성을 갖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기술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대로, 인간은 점점 기술화되려 한다. 스마트폰, 가전제품부터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이미 상당 부분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과 기술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 인간다움일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우리에게 기술 그리고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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