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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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은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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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은 서로 충돌하는 두 의견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주장이 대립되는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학문적 이론이나 사회적 주장이 양분되어 있을 때, 어느 한편에도 동의하지 않는 제3자가 새로운 주장을 전개하는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양비론은 잘못된 것인가?
양비론은 종종 비판받는다. 그것은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태도가 마치 무책임한 회피로 읽히기 때문이다. “둘 다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나, 차악을 옹호하거나 방관하는 태도가 양비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라면, 그 비판은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양비론은 중요한 비판적 도구라고 믿는다.
현실적으로 양측의 잘못의 정도가 같을 수 없다. 당연히 더 크고 심각한 잘못에는 더 강한 비판과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잘못의 경중을 무시한 채 “둘 다 잘못했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이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쪽의 책임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양비론은 건강한 비판이 아니라 무책임한 회의론이 될 뿐이다.
따라서 양비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되 잘못 자체는 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를 비판하면서 다른 하나의 잘못을 덮어주는 태도는 '양비론'보다 더 위험하다. 비판의 크기는 잘못의 크기에 비례할 수 있지만, 비판의 여부는 결코 특정 대상에게서 면제될 수 없다.
양비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종종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덜' 잘못했기에 비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비판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잘못이 비교적 적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덜' 잘못한 쪽이라 하더라도 그 내재된 문제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시스템의 지속적인 부패를 초래한다. 또한, 그런 태도는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가진 이들에게 스스로의 오류를 반성하고 개선하려는 여지를 박탈할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종종 “누가 더 잘못했느냐”는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때 양비론을 비판하는 논리를 적용하면, 한쪽의 잘못은 다른 쪽의 더 큰 잘못으로 인해 무한정 면제받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덜 나쁜 선택'을 강요받는 환경이 굳어지고, 정치권으로 하여금 국민 ‘전체’가 아닌 극단적 성향의 ‘지지층’만을 위한 정치에 빠지게 만든다.
작금의 정치 현실은 '편들기'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선택한 정당이나 후보, 내가 찍은 대통령이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 이를 감싸거나 묵인하는 일이 반복된다. "우리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유예하고, 심지어 반대편의 비판을 덮기 위한 방어 논리를 찾는 모습은 정치의 본질적 문제 해결을 방해할 뿐이다. 누군가의 지지자가 된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이 있을 때 이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정치 개혁은 '콘크리트 지지층'이 아니라, 유연한 유권자들로부터 온다. “내가 지지했으니 끝까지 지지한다”는 태도는 정치적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정치적 책임을 가볍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관심과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자신들의 잘못이나 비윤리적 행위를 개선하려는 동기를 잃게 된다. 그러나 국민이 언제든 다른 정당이나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한다면, 정치인들은 국민의 요구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